이곳은 개발을 위한 베타 사이트 입니다.기여내역은 언제든 초기화될 수 있으며, 예기치 못한 오류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문단 편집) === 2000년대 이전 === 비교적 근래인 1980년대까지만 해도 축구 변방인 아시아 내에서도 강팀이 아니었다.[* 아예 성과가 없었던 것은 아니고, 1936 베를린 올림픽 축구(16개국 본선 진출) 8강(8위), 1968 멕시코시티 올림픽 축구 동메달(3위)를 기록하였다. 특히 베를린 올림픽 8강은 일본에서 ‘베를린의 기적’이라 불리며 과거 일본 축구계에서 전설로 회자되는 업적이었다. 지금이야 올림픽 축구의 위상이 그리 높지 않지만 2차 대전 이전에는 신생 대회였던 월드컵의 위상을 압도하였는데 1930년대의 월드컵은 너무 멀리서 열린다는 이유로 출전을 거부하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그러나 [[제2차 세계 대전]]으로 중단되었던 올림픽과 월드컵이 각각 1948년, 1950년에 재개한 이후 월드컵이 올림픽 축구를 역전하고 그 격차가 벌어지면서 올림픽 축구는 축구 중심인 유럽과 남미에서 메이저 대회로 평가받지 못하고 주로 공산국가에서 메달을 차지하는 반아마추어성 대회로 그 위상이 추락하였다. 이러한 연유로 일본 입장에서는 아쉽게도 전전까지 월드컵 이상의 위상을 가졌던 올림픽 축구에서 거둔 1936년 베를린 올림픽 8강(8위)의 성과까지 묻히고 월드컵 기록만 평가받게 되었다. 한편 멕시코시티 올림픽 3위는 순위상으로 베를린 기록보다 높지만 양 대회 위상의 차이가 이미 벌어진 이후의 기록인지라 고평가의 여지가 상대적으로 적다.] 이때까지는 축구 프로 리그도 출범하지 않았고[* 대한민국은 프로축구가 일본보다 10년 이른 1983년에 출범했다. 1980년대 한국과 일본의 경제력 격차를 고려하면 일본 프로축구 출범이 굉장히 늦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일본은 1988년 이전까지 아시안컵 10개국 본선을, 1998년 이전까지 월드컵 본선 무대를 밟아보지 못한 축구의 불모지였다. 실제 이 시점까지 일본의 국기(國技)였던 [[야구]]와 [[스모]]에 비해 축구에 대한 민간의 관심은 현저히 낮았고 제대로 된 투자조차 이루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1990년대 초반 프로 축구 리그인 J리그가 출범하고 92아시안컵 8개국(8강) 본선에서 우승을 차지했으며, 2002 월드컵 유치를 위해 축구에 대한 대대적인 투자가 이루어지면서 아시안컵 최다 우승국이자 월드컵 본선에 꾸준히 이름을 올리는 아시아의 강호 중 하나로 자리매김하였다. 상술한 이유로 월드컵과는 꽤나 늦게 인연을 맺었는데, 지역예선에서 한국에게 패하여 [[1954 FIFA 월드컵 스위스]] 16개국 본선부터 본선 무대를 밟지 못하고 줄곧 지역예선에만 머물렀다. [[1994 FIFA 월드컵 미국]] 아시아 지역 최종예선에서는 숙적 한국에 첫 승리를 거두고 이 기세를 몰아서 이라크를 꺾어 본선에 진출하는 듯 했으나 [[도하의 기적|옴란 자파르의 동점 헤딩 골로 인해서 이라크와 무승부를 거두는 바람에 골득실에서 한국에 밀리면서 94 월드컵 24강 본선 진출 실패의 고배를 마셨다.]][* 이 당시 일본이 받은 충격은 말로 설명이 불가능하다. 움란 자파르의 동점골이 기록되는 순간 일본 선수들은 그대로 그라운드에 누워버렸고 본국에서 TV를 통해 응원전을 펼치던 팬들 역시 그대로 굳어졌다. 그리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리면서 일본 전역은 울음바다가 되었다.] 참고로 일본 축구 역대 최다 실점 패를 안겨준 나라는 [[필리핀 축구 국가대표팀|필리핀]]이다. 일본 대표팀[* 대표팀이라지만 사실은 선발 과정을 거친 대표팀이 아닌 대학교(현재의 [[쓰쿠바대학]]) 축구부였다.]의 첫 국제 대회 참가인 1917년 일본 극동컵 경기에서 무려 '''2:15'''로 졌는데, 이는 당시 필리핀에 스페인계 혼혈인 [[파울리노 알칸타라]](1896~1964)가 맹활약했기에 가능했다.[* 알칸타라는 [[FC 바르셀로나]]에서 399경기 395골로 경기 당 거의 1득점씩을 기록한 바르셀로나의 레전드 플레이어였고 당연히 [[리오넬 메시]]가 경신하기 전까지는 구단 역사상 최다 득점 기록이었다.] 일단 일본 축구 협회는 이 대회를 공식 A매치로 인정하지 않는다. 일본축구협회가 공인하는 일본 대표팀의 첫 A매치는 1923년 극동컵 필리핀과의 경기였다. 이 경기 역시 1:2로 패배했다. 일본 대표팀의 A매치 첫 승리 상대 역시 필리핀이었는데 1927년 극동컵에서 2:1로 승리했다. 그리고 2:15 패배로부터 딱 50년 뒤인 1967년, 일본은 1968 멕시코 올림픽 지역예선에서 이번에는 필리핀을 상대로 '''15:0'''으로 승리하면서 시원하게 복수했는데, 이는 일본 축구 국가대표팀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이다.[* 필리핀에는 최다 실점 패 기록이다.][* 여담으로 라이벌 [[대한민국 축구 국가대표팀|대한민국]]은 1948년 런던 올림픽에서 [[스웨덴 축구 국가대표팀|스웨덴]]전 0:12 패가 한 경기 최다 실점, 2003년 아시안컵 예선 [[네팔 축구 국가대표팀|네팔]]전 16-0 승리가 한 경기 최다 득점이다. [[중국 축구 국가대표팀|중국]]은 2012년 [[브라질 축구 국가대표팀|브라질]]에 당한 0:8 패배가 한 경기 최다 실점, 2000년 [[괌 축구 국가대표팀|괌]]을 상대로 거둔 19:0 승리가 한 경기 최다 득점 기록이지만, 괌에게 한 경기 최다 실점 기록을 안겨준 팀은 2005년에 21:0으로 이긴 [[북한 축구 국가대표팀|북한]]이다. 북한은 [[2010 FIFA 월드컵 남아프리카공화국|2010년 남아공 월드컵]]에서 [[포르투갈 축구 국가대표팀|포르투갈]]에 당한 0:7 패배가 한 경기 최다 실점인데, 애초에 중국과 북한은 오랫동안 국제대회에서 빠졌기 때문에 일본과 한국보다 참가한 경기 수가 적다.] [youtube(fdXdayBu_7Y)] 96 애틀란타 올림픽 축구[* 16개국 본선 진출 대회]에서 [[니시노 아키라]][* 2018월드컵 일본 16강(15위) 감독.] 감독의 U-23 일본 대표팀이 아시아 모든 연령 최초로 피파랭킹 1위이자 [[마리우 자갈루]] 감독의 호나우두 브라질을 1:0으로 이기는 이변을 일으키고 뒤이어 헝가리도 이겼으나, 금메달팀 나이지리아[* 당시 나이지리아에는 [[본프레레]]가 있었으며, 금메달은 나이지리아, 은메달은 아르헨티나, 동메달은 브라질이었다.]에 패하여 2승 1패 대회 9위로 8강은 실패했다. 32강으로 확대된 [[1998 FIFA 월드컵 프랑스]] 지역 최종예선에서는 또 다시 한국과 만났고 도쿄에서 열린 1차전에서는 야마구치 모토히로가 선제골을 기록했으나 후반전에서 [[서정원]]과 [[이민성]]의 골로 인해 [[도쿄 대첩(축구)|2:1로 역전패를 당하고 말았다]]. 이 경기 이후 [[카자흐스탄 축구 국가대표팀|카자흐스탄]]과의 경기에서도 어처구니 없이 종료 직전에 동점골을 먹혀 1:1로 비긴 바람에 가모 슈 당시 대표팀 감독이 전격 경질[* 당시 일본 팬들은 [[훌리건]]으로 변해 기물을 집어던지고 선수들에 대한 청문회를 요청할 정도로 험악한 분위기였다. 도하의 비극 때는 통한의 무승부로 인해 본선 진출이 좌절됐기에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내리 2패를 당한 터라 동정의 여지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사실 무승부도 대단한 성과였는데 당시 카자흐스탄에서의 경기는 열악한 현지 사정으로 인해 원정팀들에게는 무덤과도 같았다. [[차범근호]]도 무승부를 기록했고, 심지어 [[아랍에미리트 축구 국가대표팀|UAE]]는 패배했다.]되었고, 수석 코치인 [[오카다 다케시]]가 감독으로 임명되었다. 그래도 서울에서 열린 한국과의 2차전에서 승리하였고 B조 2위를 기록하며 A조 2위인 [[이란 축구 국가대표팀|이란]]과 플레이오프를 치렀다. 말레이시아 조호르바루에서 치러진 플레이오프에서는 전반 36분 [[나카야마 마사시]]가 선취골을 뽑아냈으나, 후반 25초 이란은 [[알리 다에이]]의 패스를 받은 [[호다다드 아지지]]가 동점골을 뽑아내며 추격을 시작했고, 후반 14분에는 다에이가 헤딩골로 뽑아내며 역전에 성공한다. 패색이 짙어지던 찰나 후반 31분 [[나카타 히데토시]]의 패스를 받은 조 쇼지가 헤딩골을 성공시키며 승부는 원점이 되었고, 연장 후반전 13분에는 나카타의 슛이 이란 골키퍼의 손을 맞고 나온 공을 오카노 마사유키가 슬라이딩으로 밀어넣어 3:2로 승리하면서 처음으로 월드컵 32강 본선에 진출했다. 이 경기는 일본에서는 [[조호르바루의 환희]]로 불리며 지금까지도 회자된다. 32강 본선에서는 크로아티아, 아르헨티나, 자메이카와 함께 H조에 배정되었으나 3전 전패를 당해 대회 전체 31위에 머물며 탈락했다. 그래도 모든 경기에서 1골차로 패배하는 등 처녀 출전임을 감안하면 선전했으며, 자메이카 상대로 월드컵 첫 득점을 기록했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